[법정 스님 밝은 편지]
이해인 수녀님께!
수녀님, 광안리 바닷가 그 모래톱이 내 기억의 바다에 조촐히 자리잡습니다.
주변에서 일어난 재난들로 속상해 하던 수녀님의 그늘진 속 뜰이 떠오릅니다.
사람의, 더구나 수도자의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기만 한다면
자기도취에 빠지기 쉬울 것입니다.
그러나 다행히도 어떤 역경에 처했을 때
우리는 보다 높은 뜻을 찾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.
그 힘든 일들이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알아차릴 수만 있다면
주님은 항시 우리와 함께 계시게 됩니다.
그러니 너무 자책하지 말고 그럴수록 더욱 목소리 속의 목소리로 기도 드리시기 바랍니다.
신의 조영 안에서 볼 때 모든 일은 사람을 보다 알차게 형성시켜 주기 위한 배려라고 볼 수 있습니다.
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그런 뜻을 귓등으로 듣고 말아 모처럼의 기회를 잃고 맙니다.
수녀님,
예수님이 당한 수난에 비한다면 오늘 우리들이 겪는 일은 조그만 모래알에 미칠 수 있을 것입니다.
그러기에 옛 성인들은 오늘 우리들에게 큰 위로요 희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.
그 분 안에서 위로와 희망을 누리실 줄 믿습니다.
이번 길에서 수녀원에서 하루 쉬면서 아침미사에 참례할 수 있었던 일을
무엇보다 뜻 깊게 생각합니다.
그 동네의 질서와 고요가 내 속 뜰에까지 울려 왔습니다.
수녀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.
산에는 해질녘에 달맞이꽃이 피기 시작합니다.
참으로 겸손한 꽃입니다.
갓 피어난 꽃 앞에 서기가 조심스럽습니다.
심기일전하여 날이면 날마다 새날을 맞으시기 바랍니다.
그 곳 광안리 자매들의 청안(淸安)을 빕니다.
[이해인 수녀님 맑은 편지]
법정 스님께!
스님,
오늘은 하루 종일 비가 내립니다.
비 오는 날은 가벼운 옷을 입고 소설을 읽고 싶으시다던 스님.
꼿꼿이 앉아 읽지 말고 누워서 먼 산을 바라보며
두런두런 소리 내어 읽어야 제 맛이 난다고 하시던 스님.
가끔 삶이 지루하거나 무기력해지면
밭에 나가 흙을 만지고 흙냄새를 맡아 보라고
스님은 자주 말씀하셨지요.
며칠 전에 스님의 책을 읽다가 문득 생각이 나
오래 묵혀 둔 스님의 편지들을 다시 읽어보니
하나같이 한 폭의 아름다운 수채화를 닮은 스님의 수필처럼
향기로운 빛과 여운이 남기는 것들이었습니다.
언젠가 제가 감당하기 힘든 일로 괴로워 할 때
회색 줄무늬의 정갈한 한지에 정성껏 써 보내 주신 글은
불교의 스님이면서도 어찌나 가톨릭적인 용어로 씌어 있는 지
세상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.
수년 전 저와 함께 가르멜 수녀원에 가서 강의를 하셨을 때도
'눈 감고 들으면 그대로 가톨릭 수사님의 말씀'이라고
그 곳 수녀들이 표현했던 일이 떠오릅니다.
왠지 제 자신에 대한 실망이 깊어져서 우울해 있는 요즘의 제게
스님의 이 글은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 오고, 잔잔한 깨우침과 기쁨을 줍니다.
어느 해 여름,
노란 달맞이꽃이 바람 속에 솨아솨아 소리를 내며 피어나는 모습을
스님과 함께 지켜보던 불일암의 그 고요한 뜰을 그리워하며
무척 오랜만에 인사 올립니다.
이젠 주소도 모르는 강원도 산골짜기로 들어가신데다가
난해한 흘림체인 제 글씨를 늘처럼 못마땅해 하시고
나무라실까 지레 걱정도 되어서 아예 접어 두고 지냈지요.
스님,
언젠가 또 광안리에 오시어 이 곳 자매들과
스님의 표현대로 '현품대조'도 하시고,
스님께서 펼치시는 '맑고 향기롭게'의 청정한 이야기도 들려주시길 기대해 봅니다.
이곳은 바다와 가까우니 스님께서 좋아하시는 물미역도 많이 드릴 테니까요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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